미국이 과학기술 패권 경쟁의 판을 다시 짜고 있다. 미 에너지부(DOE)가 인공지능(AI)을 핵심 으로 첨단 제조부터 핵융합, 양자컴퓨팅, 핵 비확산까지 26개 국가 과제를 동시에 공략하는 '제네시스 미션(Genesis Mission)'을 지난 12일(현지시간) 공식 발표했다. 단순히 AI를 보조 도구로 활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 전략 과제 전체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겠다는 '체제 전환 선언'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첫 번째 주요 과학기술 정책 문서인 이 보고서는 DOE 산하 17개 국립연구소의 인프라와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미국의 기술 패권을 재확립하겠다는 전략을 담고 있다. 모든 과제에 AI 적용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AI 주도형 자율실험실, 디지털 트윈 기반 제조혁신, AI 설계 신소재 등 AI가 연구개발의 중심축이 되는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마이클 크라치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 국장 겸 대통령 보좌관은 "제네시스 미션은 뛰어난 미국의 과학 인프라와 AI 를 통해 과학적 발견 속도를 두 배 빠르게 하고 있다"면서 "26개 도전과제는 연구자와 혁신가들이 함께 하며 국민에게 혜택이 되는 과학, 기술 혁신을 실현하라는 행동 촉구"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제네시스 미션의 26개 과제는 제조·산업(1-3번), 에너지(4-7번), 첨단기술(8-14번), 인프라 및 국가안보(15-26번)의 네 범주로 나뉜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서 전체를 관통하는 단일한 전략 논리가 있다.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를 전략 자산으로 전환하고, AI로 혁신 속도를 극적으로 높이겠다는 것이다.
◇ '죽음의 계곡'을 넘는다, AI 기반 제조 혁신
제네시스 미션의 1번 과제는 '첨단 제조와 산업 생산성의 재구상'이다.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로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지목한다. 과학적 발견이 상업화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적 단절이다.
DOE는 AI가 다중 스케일·고차원 동적 시스템을 탐색해 숨겨진 물리·화학적 관계를 찾아내고 새로운 제조 경로를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공장 설비, 제품, 공정, 공급망의 실시간 데이터를 통합한 디지털 트윈(현실 시스템의 가상 복제본)을 구축하고, 인간-기계 협업 기반 자동 의사결정 체계를 구현하겠다는 전략이다.
생명공학 분야에서는 유전체·멀티오믹스 데이터를 통합해 생물학적 설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디지털 트윈을 활용해 바이오 연료와 바이오소재 생산을 가속하겠다는 계획도 담겼다.
◇ 에너지 전략의 전면적 AI, 핵융합은 한국과 교차점
에너지 분야는 핵심 광물 공급망 확보, 차세대 원자력, 핵융합 가속, 핵 폐기물 정화의 네 축으로 구성된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핵융합 가속화(6번 과제)다. DOE는 플라스마·핵·소재·시스템 거동을 통합하는 'AI-핵융합 디지털 수렴 플랫폼(DCP)'을 구축해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를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이 플랫폼은 고성능컴퓨팅 코드에 탑재된 새로운 알고리즘, 플라스마·소재 과학용 기반 모델, 물리·화학 정보를 내장한 신경망, 서로게이트 모델, 그리고 실시간 제어를 위한 디지털 트윈을 결합한다.
한국의 KSTAR(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가 세계 기록을 경신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DOE 로드맵에서 제시한 6대 핵융합 과제 영역과 한국의 강점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차세대 원자력은 '더 빠르고, 더 안전하고, 더 저렴하게'를 목표로 한다. AI를 활용해 설계, 인허가, 제조, 시공, 운영 전 과정을 통합 최적화하고 최소 2배의 일정 단축과 50% 이상의 운영비 절감을 달성하겠다는 방침이다.
핵 폐기물 정화는 80년간 5400억 달러 규모의 환경 정화 부담을 AI 기반 모델로 단축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30년 이상 축적된 운영 데이터를 학습해 실험실·파일럿·대형 설비 간 스케일 차이를 예측하는 모델을 개발한다.
핵심 광물 분야에서는 지질 데이터, 공정 데이터, 경제 모델을 통합하는 AI 시스템을 구축해 자원 탐사·추출·정제·대체 소재 개발을 동시에 최적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단순 탐색 자동화가 아니라, 물성-구조 관계를 이해하는 ‘과학적 추론 AI’를 지향한다.
◇ 양자·반도체·데이터센터, 기술 패권의 핵심 축
첨단기술 분야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AI 기반 양자 알고리즘 자동 설계, 양자 시스템 제어 최적화, 반도체 생산의 미국 내 재집중, 데이터센터 기술 리더십 확보가 포함됐다.
양자 분야에서는 AI가 자연어로 된 문제 설명을 양자 회로로 변환하고, 노이즈 보정·오류 정정을 실시간으로 수행하는 구조를 구상한다. 단순한 계산 속도 향상을 넘어 '양자-고전-HPC-AI'의 통합 워크플로우 구축을 의미한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AI 기반 풀스택 공동설계 생태계를 통해 소재-소자-공정의 상호관계를 최적화하고, 경쟁국 기술을 단번에 추월하겠다는 의지를 명시했다.
◇ 자율실험실과 역설계, 연구 패러다임 전환 선언
제네시스 미션에서 가장 주목할 과제 중 하나는 'AI 기반 자율실험실'이다. 로봇, 엣지 AI, 실시간 데이터 분석, 가설 생성 알고리즘을 결합해 인간 중심의 실험 프로세스를 부분 자동화한다.
소재 설계 분야에서는 물리 인지형 AI 프레임워크를 통해 예측-합성-특성 분석-재학습을 반복하는 폐루프 학습 체계를 구축한다. 목표는 '역설계(inverse design)'다. 원하는 성능을 먼저 정의하고 이에 맞는 물질 조성을 역으로 설계하는 방식이다.
DOE가 이 같은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물리 인프라가 있다. 입자가속기, 중성자 산란 시설, X선 광원, 엑사스케일 슈퍼컴퓨터 등은 AI 모델 훈련과 검증에 없어서는 안 될 기반이다. 수십 년간 축적된 핵무기·핵융합·환경 정화·소재·생명공학 데이터는 일반 연구기관이나 민간 기업이 대체할 수 없는 자산이다.
제네시스 미션은 이 인프라를 AI 플랫폼 위에 얹어 '국가 과학기술 통합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다. 26개 과제는 개별 사업이 아니라 공통 AI 기반 위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 국가안보까지 확장된 AI, 80년 핵 데이터의 전략 자산화
20번부터 26번까지는 국가안보 관련 과제다. 핵 위협 대응, 핵 실험 데이터 디지털화, 실험 시설 운영체계 자동화, 핵 확산 감시 AI, 핵물질 출처 추적 AI 등이 포함됐다.
특히 80년 이상 축적된 핵 실험·연구 데이터를 디지털화해 AI 학습 데이터로 전환하겠다는 전략은 데이터 자산화의 상징적 사례다. 단순 기록 보존이 아니라 과거 데이터를 미래 전략 자산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다. 핵 위협 대응 분야에서는 방사선 센서, 시뮬레이션, 정보 데이터를 통합하는 다중모달 AI를 구축해 탐지에서 대응까지 걸리는 시간을 '수일에서 수시간'으로 단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같은 전략이 가능한 배경에는 DOE 산하 17개 국립연구소 체제가 있다. 문서는 DOE 국립연구소의 강점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데이터 자산이다. 핵무기·핵융합·환경 정화·소재·생명공학 등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는 일반 연구기관이나 민간 기업이 대체할 수 없는 자원이다. 둘째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물리 인프라다. 입자가속기·중성자산란시설·X선 광원·핵연구 시설 등은 AI 모델 훈련과 검증에 없어서는 안 될 기반이다. 셋째는 민간 협력 생태계다. DOE는 산업체와 데이터를 공유하고 공동 연구하는 오랜 관행을 갖고 있으며, 이를 AI 가속 혁신의 연결고리로 활용한다.
제네시스 미션은 이 인프라를 AI 플랫폼 위에 얹어 ‘국가 과학기술 통합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다. 26개 과제는 개별 사업이 아니라, 공통 AI 기반 위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한국도 35조 5000억원 규모의 역대 최대 R&D 예산을 편성하고, 30년간 현장을 옥죄던 과제중심제도(PBS) 폐지를 추진하는 등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AI 관련 예산은 2025년 3조 원에서 2026년 9조 9000억 원으로 3배 이상 늘었다. 과기정통부 소관 AI 예산만 보더라도 전년 대비 106.1% 증가한 2조 3000억 원이 배정됐다. GPU 1만 5000장 이상, 2030년까지 민관 합산 GPU 5만장 확보,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 계획도 담겼다. 반도체·양자 로드맵도 존재한다. 방향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속도와 규모, 무엇보다 실행 인프라 면에서는 간극이 크다. 출연연의 데이터 자산을 통합 관리하는 플랫폼, 대형 AI 전용 슈퍼컴 인프라, 자율실험실 체계, 산업 데이터 공유 모델 등 미국처럼 전 과제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수준의 통합 전략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등이 K-제네시스 미션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미국의 제네시스 미션은 AI 패권 경쟁이 소프트웨어 산업을 넘어 제조, 에너지, 반도체, 국방, 과학 인프라 전반으로 확전됐음을 보여준다. AI는 이제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혁신 시스템 전체를 재구성하는 기반 기술이 됐다. 한국이 어떤 전략을 선택하고 출연연 체제를 어떻게 재정비하느냐에 따라 향후 10년의 기술 격차, AI 기술패권의 간극을 좁혀가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원문보기 :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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